2025. 2. 12. 21:59ㆍ2025
몇 년간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지어 온 과제 같은 게 있다. 한 해 동안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린 그림들 중 의미 있는 화면 구성을 하나 꼽아 200호(가로*세로 2미터 남짓) 정도의 크기로 확대해 그리는 것이다. 누구도 크게 그림을 크게 그리라 시키지 않았고 캔버스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많은 재료를 사용하면서 소모적이라 생각될 때도 있지만 애정하는 만큼 그 장면을 크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 개인전을 했던 2020년과 다음 해에는 다채로운 색의 꽃이 화면에 가득 찬 그림을, 2022년에는 튤립이 떨어지는 순간을, 2023년에는 저수지를 그렸다.
마산현대미술관 레지던시를 했던 2024년에는 많은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고 환경덕분에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결과발표전을 3개월 앞둔 7월에 200호 캔버스를 주문했다. 스튜디오 벽 한편에 기대어둔 큰 벽 같은 흰 캔버스를 지나칠 때마다 저 안에다 뭘 그릴지 상상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10월 말 결과발표전에 노랗게 물든 땅을 그렸다. 사실 벼가 익기 전까지는 느티나무 한 그루만 그리려 했다. 레지던시 생활을 하고 있는 미술관 바로 앞 드넓은 논 사이에 수령이 200년쯤 된 커다란 느티나무. 그 뒤에 무더운 한 여름의 습한 공기에 부옇게 보이는 적석산과 하늘을 그리고 싶었다.
어떤 장면은 빈 캔버스만 봐도 그 위에 그림으로 있다. 작년에는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빛나는 노란색의 논이 그랬다. 그런데도 논을 그린건 그때만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반대로 나무를 그리지 않은 건 그때는 나무를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시기적으로, 기술적으로. 내 안에는 그 장면이 이미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꺼내질 않아서였을까, 레지던시가 끝난 후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도 드문드문 미술관 앞의 느티나무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고 작은 종이에 그리기도 하고 괜히 차를 끌고 마산까지 가 나무를 그리러 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본게 잎이 붉은 갈색으로 나무의 꼭대기부터 차츰 물들어가던 11월이었는데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그림 그리러 갔을 때는 숨어있던 까치집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 느티나무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 <마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에 들어서면 모든 팔로 나를 보호해 주는 듯했고 빠져나와서 바라보면 그 자체로 조형미가 있는 점이 그랬다.
두 시간 반을 꼬박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눈앞의 느티나무를 그렸다. 빨, 주, 노, 파, 검은색의 잉크 펜으로 그저 눈에 보이는 색과 모양을 종이로 옮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면의 존재 자체를 내 안에 담는다 생각하고 그렸다. 갖가지 가지의 모양과 변화를 어떻게 평면에 그릴지 고민했다. 빛을 받아 보이지 않는 잔 가지들도 그림으로써 있게 했고 어떤 선의 모양이 이 나무를 잘 드러낼 수 있을지 그리면서 확인해 나갔다. 보고 그리는 건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은 붉고 푸른색의 채도 높은 색으로 그려졌지만 내 눈에는 그날의 미세먼지로 부연 빛과 건조한 가지들, 노란 하늘이 그려진다. 이제는 시기적으로, 기술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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