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사람

2025. 2. 4. 23:152025

작년 초에 나무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무에 대한 어떤 감상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한 해가 시작될 때 으레 1년간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픈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는가. 그래서 작년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에 있는 보호수 두 그루를 일 년간 그리려고 했었다. 정해진 수순대로 얼마 안 가 그리지 않게 됐지만 그럴만한 핑계는 나무가 그리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간과 재료만 있으면 어떻게든 그리겠지라는 마음이었는데 쉽지 않았다. 고개를 쳐들어야 간신히 보호수의 끝에 눈이 닿았고 그렇게 스트레칭하듯 고개를 한 바퀴 돌려야 나무를 다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a4를 반 접은 크기의 종이에 그려넣는데는 너무나도 많은 판단이 필요했다. 그리고 판단 이후의 그림 그리는 방법들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가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였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늘로 뻗은 나무 가지들을 무릎 위 작은 종이 한편에 어떻게 하면 담을 수 있을까. 그리기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재료는 무엇을 사용할 지부터 가지 중 굵은 것만 그려야 할지 하늘색과 가지 색을 조금 섞어 흐리게라도 그려야 할지 붓을 건조하게 만들어 얇은 가지들의 흐름을 표현할지 그리고 이 모든 표현이 내가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고 싶은 나무의 모습이 되게 할지.

그래서 나무를 그리러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진만 몇 장 찍어왔다. 어렴풋한 이미지만으로 나무를 그려내는 건 그나마 간편한 일이다. 사진은 그림을 그려야 할 종이만큼 작고 고정되어 있으니까 비슷하게 옮겨내기만 하면될 일인 것이다. 그래서 작년 초에 나무를 잘 못 그렸기 때문에 조금 슬펐다. 내가 그리고 싶어 하는 나무 한 그루 못 그려서 되겠냐며 자책을 했었다. 반면에 그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나는 더 나가서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거 하나 내 뜻대로 못 그리는데 내 안에서 보이는 걸 어떻게 그릴 수 있겠냔 말이다.

요즘 친구들과 종종 나가서 그림을 그린다. 지난 주엔 진전면의 큰 느티나무를 그렸고 이번 주엔 봉암수원지에 가서 호수랑 나무를 그렸다. 지난주에는 시간이 짧아 이번 주엔 시간을 넉넉히 챙겨 갔다. 이젤, 화판, 의자, 도시락까지 챙겨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만큼 계속 그리고 싶었다. 오전에는 호수를, 점심 먹고 오후에는 나무를 그렸다.

봉암수원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수원지까지는 오르막길로 약 1.5km정도를 올라갔다. 팔에 큰 화판을 끼고 걸어 올라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흡사 사냥꾼의 두근거림이 이런 느낌일까. 그래 나는 멋진 풍경을 사냥하겠다. 지금 오늘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을 종이에 담아 오겠다는 마음으로 30분간 걸어 올라갔다. 도착했을 즈음에는 너무 힘들어 패기는 다 사라졌지만 이왕 온 거 뭐라도 그리자는 마음으로 그릴만한 풍경이 보이는 자리를 찾아 나섰다. 수원지 산책로의 3분의 1쯤 갔을까. 남쪽을 바라보니 수원지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과 산,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보이는 풍경이 보여 그곳에 이젤과 화판을 설치했다.

3시간 정도 그렸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계속 바뀌어 물결을 잡아두기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잔잔할 때는 산과 하늘의 경계가 거울처럼 그대로 반사되어 보였지만 바람이 셀 때는 물결이 미세하게 다 부서져 산과 하늘의 색을 전부 섞었다. 부드러운 바람에는 넓은 일렁임이 일었고 나는 그 광경을 그렸다. 겨울이라 해가 낮게 이동해 매 순간 나무의 그림자는 길었기에 나무와 땅을 그리는데 재미가 있었다. 첫 사냥은 성공인가?

점심즈음 준우가 도착해 같이 밥을 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내 몸이 이렇게 굳어있는지 몰랐는데 매 순간 삐걱거렸다. 설날이라 현수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담아 준우편으로 전을 보내줬다. 밥 먹는 동안 너무 추워 다시 내려가고 싶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몸이 녹았다. 준우도 왔고 한 장만 더 그리자 했다. 준우는 나를 찾으러 반대편으로 한 바퀴를 더 돌았는데 오는 길에 그림을 그릴 만한 곳이 있다 하여 그곳으로 갔다. 수원지의 가장 안쪽에는 큰 정자와 운동기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또 남쪽을 바라보고 햇살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그린 건 큰 나무 한 그루. 내 생각엔 분명 벚나무인 것 같은데 주변 어르신들께서 아니라고 하니 그냥 나무라하겠다. 두 시간 반 정도 나무를 그렸다. 최근 나무를 좀 그려봐서일까. 그리면서 어느 정도의 판단이 섰다. 여기는 이런 선으로, 이 가지들은 이런 모양이면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들이 그림 그리는 동시에 들었고 좋은 호흡으로 이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명서동의 보호수를 그릴수 있을까? 아마 작년 1월보다는 확신 있는 그림을 그릴테고 앞에서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다. 나는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아직 어느 하나 내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그리진 못하지만 점점 그릴 수 있는 게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림 그리는 게 즐겁다. 그렇게 내 안에 산, 저수지, 꽃, 나무, 사람이 있어 언제든 꺼내어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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