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7. 11:56ㆍ2025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 담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저 멀리 있다가도 자기 몸이 들어설 자리만 보이면 기회다 싶어 옆이나 무릎 위로 올라와서 냅다 누워버린다. 오늘도 저녁을 먹고 침대에 잠시 걸터앉았는데 담이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와 앉았다. 나는 담이가 편하게 누을 수 있게 한쪽 팔을 동그랗게 말아 머리를 기댈 자리를 만들고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두드려줬다. 담이는 기분이 좋은지 그르릉 소리를 내며 몸을 둥글게 말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러다 담이와 눈을 마주쳤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검은 동공이 보였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두어 조도가 낮은 상태여서인지 담이의 동공이 크고 동그랗게 확장돼 있었다. 나를 보기 위해 나에게서 반사된 모든 빛을 흡수라도 하려는 듯이, 깊은 검은색이었다.
8년 전에 그렸던 그림책이 있다. 학부생 때는 그림책을 만드는 데에 재미를 느껴 내놓기엔 부끄러운 그림책 세 권을 만들었었다. 글이 없이 정말 그림으로만 이뤄진 그림책. 그중 <Alive>라는 제목의 그림책은 내가 살아있음을 언제 느끼는가에 대한 그림책이다. 내용을 글로 읊자면, 아침에 일어난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차 유리에 비친 모습, 잔에 가득한 커피에 반영된 모습과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 이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눈을 통해 자신이 인식되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책을 그리게 된 이유는 초상화 알바를 하러 가서 겪은 일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보고 따라 그리는 걸 곧 잘했다, 어릴 때 만화책을 많이 따라 그려서일까. 중, 고등학생 때는 친구, 선생님들의 캐리커쳐를 그려주곤 했다. 내가 그림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림은 누군가를 즐겁게 한다는 걸 초상화를 그리며 알았다. 그리고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초상화이다.
어찌 보면 중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나의 가장 긴 경력이 되는 그림 기술 중 하나였다. 미술대학에 들어갔었을 때도 누군가를 닮게 그리는 일을 잘하는 동기가 없어 캐리커쳐나 초상화 알바는 늘 내 차지였다.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녔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그 일은 군대에서도 지속됐고 전역 후에도 수많은 얼굴을 그리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누구보다 빠르고 닮게 그릴 수 있게 된 나에게 초상화 알바는 그저 몸을 쓰는 일이 되어갔다.
대학교 3학년 때 창원 단감축체의 캐리커쳐 알바를 갔다. “제가 올려다볼 때만 제 눈을 마주쳐 주시면 됩니다. 눈을 안 마주칠 때는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기계처럼 멘트를 하고 눈, 코 입, 얼굴형 머리카락, 옷 순으로 한 명 당 5-10분씩 그려나갔다. 눈앞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건 나에겐 기술적인 일이라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끝날 때까지 그려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치 퀘스트를 하듯이 한 명 한 명 그려나갔다. 그리고 다음 차례에 어느 여자아이가 앉았고 나는 늘 하는 멘트를 했다. “안녕~ 삼촌이 이렇게 친구 쳐다볼 때만 삼촌 눈 마주쳐 주면 돼~”.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눈을 바라봤는데 아이의 눈에 비친 내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저 이 아이에게 그림만 그려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저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나만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대상도 분주하게 자신의 외형을 종이에 옮겨내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눈동자에 반사된 내 얼굴을 보며 내가 여기에, 그리고 그 사람에게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사건의 증거로 매번 초상화를 남겼던 걸까. 그날 마금산에서 돌아오는 버스에 서서 그림책 내용을 생각했다.
오늘도 그랬다. 담이의 검은 눈동자는 미세하게 조금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빛을 흡수했다. 그 빛은 내 모양일 테고 내 몸이 반사한 빛이 담이의 동공을 통해 들어갔다는 생각에 대뜸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8년 전의 아이의 눈동자를 봤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담이의 눈에 내가 비치지 않지만, 분명 나의 빛이 누군가의 동공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는 감각은 누군가와 삶의 감각을 동기화하는 느낌이다. 초상화를 그린 다는 건 그림 그리는 사람의 기술과 재료로 그저 대상의 외형을 닮게 떠내는 것이 목적 아닌,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주목적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목적을 위해 초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수단이 될 수가 있을 정도로.
우리 살아있음을 얘기하기 위해 응시하는 것. 그 빛을 눈에 흘려 넣는 것. 그 빛을 종이 위에 다시 흘려내는 것이 그림 그리기라면, 그 결과물이 그림이라면, 그걸 잘하고 싶다. 대상이 꽃이건 나무건 사람이건 간에 말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